재수

2015. 2. 13. 10:54 from story of others

 

난 재수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과목중 수학은 젬병이었던 반면, 영어는 참 잘했다.

3학년 1년간 월례고사 영어 평균 점수 100점. ^^

같은 반에 전교일등 하는 녀석이 있었는데, 모의고사 보면 영어는 내 자리로 정답을 맞추러 옴. ㅋ 이놈의 자랑질.

내겐 목표가 있었다.

다름아닌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서 한국에도 노벨 문학상을 받게 하는 것.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내 각오가 허황된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내가 그런 목표를 세운 계기는 황순원의 '학'이란 작품을 읽고 나서다. 분단 조국의 현실.

여하튼 나름 우리도 좋은 문학작품이 있음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어했던 원대했던 나의 꿈은, 첫해 지원했던 영문과를 떨어지고, 재수 이후 학력고사 점수가 더 나빠져 불어를 전공하게 되면서 사그라들게 된다.

 

근데 아이들 둘 다 재수를 하게 되었다. 이런 건 지 아빠 안 따라해도 되는데.

큰아이는 재수 후 대학에 진학해 잘 다니고 있고,

작은애는 지난 화요일부터 강남역 대성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두녀석 중,고등학교에 이어 재수학원까지 선후배 관계가 형성되었다.

 

큰애와 작은애는 얼굴은 서로 닮았어도 성격은 참 다르다.

 

몇 주 전 일이다.

동생들과 부모님 일 때문에 상의차 집 부근에 모여 맥주 한잔 하고 있었는데, 작은애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먹을 거 사오라는 문자는 가끔 해도 전화는 통 안 하는 녀석이라 뭔일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빠.. 보고싶어!"

"엥? 너 어디냐?"

"어딘지 모르겠어. 아빠, 나 너무 힘들어"

"술 마셨냐? 친구들 같이 있어?"

"응, 물이라고 하며 줘서 막 먹었는데 술이었나 봐, 모르겠네.. 친구랑 같이 있어"

 

친구 바꾸라 해서 통화 해 위치를 알아낸 후, 나도 술한잔 한 터라 택시 후딱 주워타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애는 인사불성이 되서 190 가까이 되는 키를 주체하지 못하고 휘청휘청 하고 있었다.

 

택시. 도중하차. 또 택시. 이렇게 집에 겨우 데리고 들어와 앉혔는데, 이 친구 완전 풀어진, 하지만 목청에 힘을 주고는 왈.

집에 집사람, 큰애 모두 있었다.

 

"아빠, 너무너무 미안해"

"응? 뭐가.."

"내가 안 그래야 되는 줄 알면서도, 아빠한테 말을 자꾸 버릇없이 해. 아빠 미안해"

"하하 알았어"

"그리고 엄마, 형아! 아빠한테 잘 좀 해. 아빠가 우리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야. 아빠는 학대받고 있다구!"

 

아고고. 이건 또 뭔 소리.

 

"알았다 민성아. 어서 자라"

 

이불 깔고 덮어주고 온찜질팩 배에 해줬는데도 계속 춥다해서, 녀석 등을 문질러주기 20분 정도 후에 잠이 들었다.

사다준 여명 808도 먹지 못하고.

애는 잠들기 전까지 아빠 내 옆에 계속 있어 하는 말을 수차례 했다.

등을 문질러 주며 황당하기도 하고, 팔이 무지 아프기도 했지만, 수액 주사 맞을 때처럼 내 마음에 따스한 기운이 스며올랐다.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기특하고 눈물이 난다.

 

둘째는 이런 아이다.

정이 많고 또 그러다 보니 눈물을 자주 보이는 아이.

친구들이 꽤 따르는데, 엄마아빠 생각에 함께 하지 않았으면 하는 친구 또한 떨쳐내지 못한다.

중학교 때는 해마다 큰 거 한 건씩 어김없이 터뜨리면서 가족들 모두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렇다 보니 큰애 재수할 때보다 둘째가 재수를 하는 건 걱정이 앞선다.

물론 더 잘 될 수도 있겠고. ㅎ

 

재수는 '다시 닦는다'는 의미다.

 

제 아빠는 제대로 다시 닦지를 못했지만, 둘째아이는 잘, 제 형보다도 더 슬기롭게 몸과 마음을 잘 닦아서,

일년 뒤에 활짝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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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ane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