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끼

2014. 11. 6. 17:14 from story of my life

대학교 입학한 지 채 두달이 되지 않아서, 같은 과 한학년 여자선배가 상의할 게 있다며 나를 찾았다.

처음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는 여러가지 사회과학서를 읽고 스터디 하며 지식과 경험을 쌓아나가자는 거였는데, 쉽게 말하면 지하서클 가입 이었다.

서울에서 재수를 하며 먼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 가끔씩 만나 술한잔 하는 자리에서 시국, 그리고 데모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녀석들의 생각을 접했던 나는, 대학 들어가면 사회과학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선배의 제의를 한번에 받아들였다.

선배, 영어과 여자애, 스페인어과 남자애, 철학과 남자애, 나 이렇게 다섯이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했고, 머리 속에 주관이나 당위성이 채 영글기도 전에 시위가 있는 날이면 당연한 것처럼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져대곤 했다.

 

새로 만들어진 서클이다 보니 명칭이 필요했는데, 내가 입학 후 읽어 본 몇권의 책들 중 인상에 많이 남았던 김산의 '아리랑'이 생각나 제안했더니, 턱 하고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당시에 '아리랑'이란 담배를 솔찮게들 피우고 다닌 것도 서클명 확정에 일조 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책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민중과 지식인, 체게바라 전기' 등등 이었다.

일주일에 두번 모여 읽은 내용들을 논의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불어 공부 하는 것보다 재미 없고 무료하기만 했다.

하지만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의 고리를 끊고 민주화를 앞당겨야 한다는 생각은 입학 이전부터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시위를 통해 당시 정부의 부당함을 앞장서 사회에 알리는 것이 바로 대학생들의 몫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기성세대들의 욕을 먹으면서도 지하서클에서 공부를 하고 시위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그당시 누가 내게 반정부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말해보라 하면 또박또박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긴 하다.

 

근데 하루는 도서관 지하 모임방에서 토의를 하는 와중에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허구를 미화해서는 안된다'는 주제가 불거져 나왔는데, 그 예로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선배가 말했다.

나는 바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론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그리고 당장 우리들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또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그 안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옥토끼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건 사실 인식의 정확성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서정적이고 대대로 내려온 감성적인 부분은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는 사실의 제대로 된 인식보다도 더 크고 긍정적인 영향을 인간한테 가져다 주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아주 강하게.

그날은 우리 서클 조직 윗선의 선배 한명도 와 있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네 말에 대해 답변을 하기가 어렵다. 네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해서 분위기가 좀 어색해지기까지 했다.

 

옥토끼는 당연히 허구이긴 하다. 이미 50년 전에 인간은 달에 발을 디디기도 했고.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을 달에 실어나른 첨단 과학 우주선의 이름에 아이러니 하게도 활과 음악을 관장하는 '아폴로'라는 신화 속의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사실에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허구(픽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소설작품이나 음악 그리고 여타 여러 감성적인 것들에서 위안과 심리적인 기쁨을 얻게 되며, 이 두 가지는우리들 삶에 늘 공존해 오며 인간을 괴롭히거나 풍요롭게 만들어 왔다.

물론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기만 하면 안되겠지만,

반대로 이론과 사실만 중요시하고 그 이외의 것들을 무시한는 삶또한 황폐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두가지의 적절한 조화를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이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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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ane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