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얼굴에 함박웃음을 하며 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40여년간 대전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해오신 아버지.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 서울 모임에 초대되어 엄청나게 후한 대접을 받고 오셔서,
선물과 제자들의 환대를 연신 자랑하시며 벙글벙글 웃음을 짓곤 하셨다.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엔 정이 많은 분은 아니다.
하지만 모나지 않고 인자하신 성격으로 제자들에겐 꽤나 인기가 있는 선생님.
일제시대에 금산에서 면서기를 하신 할아버지는 중간에 돌아가신 두 아들을 빼고도 슬하에 7남1녀를 두셨는데,
그중 아버지가 둘째 아들.
맏이인 큰아버지는 공부랑은 담쌓고 지내셨던 터라, 할아버지의 귀염은 똑똑하고 공부를 꽤 잘했던 아버지의 독차지가 되었다고 할머니는 내게 자주 말씀하셨다.
15킬로미터가 넘은 거리의 초등학교를 도보로 6년간 다닌 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버지는 중학교는 대전으로 가고싶어 하셨는데, 당시 할아버지는 귀염둥이 둘째를 곁에 두고 싶어 극구 반대하셨다.
이에 아버지는 몰래 대전중학교(현 대전고등학교) 시험을 봐 합격장을 들고 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유학을 보내셨다 한다.
고등 졸업 후, 이번에는 멀리 떨어지기 싫다며 눈물로 만류하는 할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아버지는 서울로의 대학진학을 접고 충남대 영문과에 입학, 군대를 마친 뒤 보문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셨고,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하신다.
가끔 나는 아버지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 사이에 설치된 어린이용 안장에 실려 저녁에 학교에 가, 숙직실에 딸린 방에서 함께 이불을 덮고 동침을 당하곤 했다.
학교 소풍에 나를 데려가신 적도 있다.
제자들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기억 두가지.
아버지는 평생 결근이라곤 해 본 적이 없으신 분.
그런데 한번의 예외가 있었다.
당신이 담임을 맡고 있던 반 학생 몇명이 시험 전날 밤 등사실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시험지를 훔쳤는데,
당연 다음날 아침 발각이 되고 만다.
그 이튿날 아버지는 집에 눌러 계셨다. 아버지가 학교에 안 나가시다니.
이날 저녁 반장을 비롯한 학생회 간부 몇명과 선생님들 몇분이 집으로 찾아와, 마음 돌리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장면을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당시 나는 중1) 지켜본 적이 있다.
'내가 애들을 잘못 교육시켜 일어난 일이니 내 책임이고, 나는 선생으로서의 자격이 없어 퇴직하겠다'는 강건한 태도를 보이시는 터라, 수차례의 설득은 수포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가 직장을 안 나가시면 우리집은 어찌하나'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다음날 아버지는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이른 시간에 출근 하셨다. ^^
두번째는 눈이 무릎까지 내린 어느 설날 저녁.
당시 내 방은 주택 2층이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눌러대는 소리와 함께 우리집 정원이 왁자지껄 해 져 창문을 열고 내다보게 되었다.
졸업한 지 수년 된 대학생 형들 열댓명이 세배차 몰려왔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들은 그 눈쌓인 마당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께 모두 한꺼번에 넙죽 절을 하며 큰 소리로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있는 것이었다.(마치 조폭들의 한장면)
2층서 이 광경을 내려다 보던 나는 '아요, 손 발 시리겠다'고 생각 하면서도, 그렇게 존경하는 제자들을 둔 아버지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날은 추웠지만 어린 나의 마음이 포근해진 잊을수 없는 날이었다.
음식 솜씨 없는 엄마가 그날 술과 안주를 내놓느라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한테를 제외하곤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하시는 아버지.
고3 야자 때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찾아오셔서 교실 창문 밖에서 나를 바라보시다 얼마 후 내가 좋아하는 코카콜라 한 병을 건네주고 가신 아버지.
엄마가 나에게 해 준 것도 크지만,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베품도 나한테는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엄마가 내게 감성을 선물해줬다면, 아버지는 나에게 인성을 선사해주시지 않았을까?
어제 아침,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태워다 드린 후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명색이 자식인데, 제자들보다도 행복을 덜 안겨드리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앞으로 더 잘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