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당시 대전에선 유일한 사립이었다.
성모초등학교.
한 학년당 두개반 100여명 정도로 운영되고 추첨을 통해서 입학이 가능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은행알이 수백개 들어있는 육각형으로 된 북모양의 투명한 통이 강당 테이블에 세워져 있었는데,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두번 왼쪽으로 한번 돌리면 은행알이 하나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말그대로 뺑뺑이 돌리기.
엄마가 강당 아랫쪽 문에서 일곱살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합격의 표시로 도장이 박힌 은행알을 심사관이 들어보이자,
함박웃음에 박수를 치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교실 뒷편엔 개인 장과, 도시락을 데우기 위한 온장고 그리고 열대어들이 헤엄쳐다니는 길다란 어항이 있었다.
난방은 스팀이었고, 수세식 화장실.
실내화를 신고 복도를 다닐 때는 반드시 뒷꿈치를 들고 걸어야한다고 교육받았다.
교훈이 지금도 기억 난다.
'거짓 없고, 감사할 줄 알며,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
독일계 카톨릭 재단으로 운영되던 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일년내내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여름에는 백색 짧은 양말 위로 밝은 노란색 반바지에 하얀 셔츠,
겨울에는 검정색 타이즈와 반바지에 진노랑 셔츠 위에 옅은 잿빛 스웨터.
교복을 만든 독일의 디자이너는 '백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목표로 했다하는데,
그의 말대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디자인이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교복의 백미는 옷이 아닌 모자였다.
얇은 챙이 달린 천으로 된 진노랑색 캡으로 꼭지에서 아랫쪽으로 여섯개의 검정줄이 내려와 있었다.
그래서 대전 사람들은 모자를 쓴 우리들이 지나가면 '노랑개나리'라고 불렀다고(고모의 전언) 한다.
학교 교화가 개나리였다.
정문에서 건물까지 5분정도를 올라가야 했는데,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축대와 학교 외벽 담장은 봄이 오기 시작하면
개나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밝디밝은 노란색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수많은 기억들중 한가지.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난 항상 마음이 울적했다.
엄마가 약국을 하고 있어 오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4학년 참관 수업날이었는데, 시간이 다가오자 친구 부모님들이 오기 시작했고 웅성거림이 커질수록 마음이 어두워졌다.
근데 그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업 전 쉬는 시간에 신발을 챙겨신고 나가 학교 정문이 보이는 운동장 끝자락에 서서
'혹시 엄마가 오지 않을까'하고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엄마가 못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업 시작이 한참 지나는 것도 무시하고 눈물이 맺힐때까지 뚫어지라 정문을 바라보면 서있었던 건,
아마도 엄마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고 싶은 어린 심리의 발동이었던 것같다.
우리집도 약국 운영덕에 경제적으로 결코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매우 부유한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잔디밭 한가운데 풀장이 집에 있는 친구.
대전에서 가장 큰 약국집 아들.
제일 유명한 보석방을 운영하는 부모님.
바이올린으로 줄리아드 입학을 위해 외국인 학교에 다니는 친구 등등.
이렇다 보니 나는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낀 적이 많았고
졸업이후 또 대학까지 한두명을 제외하곤 초등학교 친구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던 거 같다.
입사를 해 소공동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일하던 어느날 초등학교 동창회를 사무실 가까운 곳에서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한참을 망설이다 친한 친구가 끌고가 억지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 술한잔 하며 내린 결론은,
이 친구들도 나하고 마찬가지로 똑같이 힘들어하거나 즐거워하며 고민도 많이 안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란 것.
이후 친구들과 가끔씩 만나 술한잔 앞에 놓고 웃고 떠들고 하며 옛날의 파릇한 기억들을 되살리곤 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기도 한다.
개나리 담장에 둘러싸여 함께 어린 시절을 같이한 친구들.
소중한 아이들이다.
이제 곧 한강변에도 개나리가 활짝 피겠지.
화사한 봄날을 기대해 본다.
* 졸업앨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