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2012. 10. 25. 08:09 from music, film & literature


정명훈을 처음 본 건, 재수하던 해 세종문화회관에서였다.

그는 KBS교향악단 지휘봉을 잡고 있었고, 그날 3층 객석에서 사회를 보던 손석희가 파릇파릇할 때니 꽤 오래된 이야기다.
주머니 사정상 가장 싼 5천원짜리 자리를 산 덕에 3층 제일 높은자리(?)에 앉다보니, 자리잡은 단원들을 보고있는데 마치 스키장 맨꼭대기에서 콘도건물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뭐 소리나 제대로 들릴까?
사실 더 큰 걱정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



한데 기우였다.

 

당일 공연의 메인 레퍼터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리드로 시작되 오케스트라가 주동기를 아련하게 이어받는 예의 1악장 도입부가 육중한 수레처럼 번져나올 때, 울컥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의 지휘는 전에 보지 못한, 또한 앞으로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몸짓이었다.

멈출듯 하면서 다시 격정적으로, 안쪽 직선으로 파고드는가 했더니 순간 반원을 그리기도 하고.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밖에서 안으로 팔을 이동하며 곡조를 리드하는 반면,

정명훈은 반대로 첫음의 손동작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연주자들은 주의를 놓을 틈이 없다.

마치 엇박자로 반템포 빨리 팔움직임을 가져가는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그의 움직임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제일 먼곳에서도, 매우 생생하고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내 마음속에 새겨진다.

 

몸이 왜소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움직임은 보다 크고 생동감 있다.

 

네살에 피아노를 시작, 20세에 차이콥스키 콩쿨에서 2등을 차지한 그는 앙드레 프레빈의 모습을 보고 지휘자의 길을 선택, 두번째로 줄리아드에 입학 줄리니에게 사사를 받는다.

줄리니에게서 그는 음악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밑바탕되야 한다는 걸 배운다.

실제로 그의 몸짓을 보고있자면, 단원들 하나하나를 아끼고 생각하는 심정이 진하게 베어있는 움직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한 협주곡이 진행될 때는 자신의 몸짓을 죽이며, 협주주자를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노력 또한 이같은 배려와 사랑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스토리는 영예와 가시밭길이 함께 한다.

세계적 명성의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을 맡은 그는, 3년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지만, 그후 2년도 안되 정치적인 문제로 파리에서의 지휘봉을 놓게된다.

고국에 돌아와 다시 호흡을 맞춘 KBS교향악단과의 인연도 4개월여만에 중단된다.

 

2003년 서울시향과의 만남으로 그는 부활한다.

급기야 아시아 최초로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을 취입, 지금까지 4개의 음반을 내놓으며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마에스트로.

 

그가 없었으면 지금의 서울시향은 없다.

그가 있기에 우리는 빈이나 베를린에서 처럼 최상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린다.

 

'클래식을 한다는 것은, 한평생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전언을 평생 마음에 두어야겠다.

 

아, 그처럼 요리도 이제 좀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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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ane k. :